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살라흐 앗 딘 유수프 (문단 편집) === [[3차 십자군]]과의 싸움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리처드살라딘.jpg|width=100%]]}}} || 3차 십자군이 야파에서 살라흐 앗 딘의 공격을 물리친 직후, 프랑스의 '존엄왕' [[필리프 2세]]가 리처드의 동생 [[존 왕|존]]과 짜고 리처드의 [[프랑스]] 내 영토를 공격하여 [[리처드 1세]]도 프랑스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라 더 이상의 원정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래서 리처드는 살라흐 앗 딘에게 "부활절까지 돌아올 테니 그때 결판을 내자."라고 약속하였고 살라흐 앗 딘도 그에 응했다. 아쉽게도 살라흐 앗 딘은 약속일인 부활절 3주 전에 [[다마스쿠스]]에서 병사했고, 리처드도 프랑스와의 전쟁 중에 유시에 맞아 죽었다. 이때 두 군주 간의 관계는 꽤 신사적인 편이었다. 물론 약간의 경쟁심도 있었겠지만... 리처드가 병에 걸렸을 때 살라흐 앗 딘은 자신의 의사에게 치료받을 것을 권유했으며, 약으로 쓰라고 시원하게 눈 속에 덮어놓은 과일을 리처드에게 보냈다. 리처드가 말을 잃었을 때 살라흐 앗 딘은 대신하라고 말 두 마리를 보냈다. 리처드 또한 살라딘을 고평가하면서 살라딘을 예우했으며, 사절단으로 찾아온 살라딘의 일족 사람들에게도 정중하게 대했고 살라딘의 조카였던 [[알 카밀]]에게 기사 작위를 선물로 주기도 했다. 리처드는 살라흐 앗 딘에게 자신의 누나 조안을 살라흐 앗 딘의 형제에게 결혼시킴으로서 이슬람과 가톨릭을 화해시키고 예루살렘은 결혼 선물로 하자고 제안했다. 양측의 성지였던 예루살렘을 양측의 공동 영지로 지정해 서로가 싸우지 말고 잘 살자는 의미였고, 살라딘은 이를 실제로 고려하였는데(!) "어떻게 회복한 예루살렘인데!!"라며 결사 반대한 참모들 때문에 성사되지는 못하였다. 애초에 살라딘은 성도 탈환이라는 기치 하에 일어난 지하드 덕에 세력을 확장했기 때문에 자칫 반란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건 기독교 세력도 마찬가지로 반대가 무척 컸고, 이슬람도 기독교도 혼인성사 문제 때문에 한쪽의 개종 문제가 생겨서 결국 취소되었다. 그 이후 리처드는 예루살렘의 지정학적 문제 때문에 가급적 협상을 통해 예루살렘을 손에 넣으려고 했다. 한편, 살라딘과 리처드는 실제로 얼굴을 마주대고 만난 적은 없고[* 리처드가 싸우는 장면을 살라딘이 후방에서 관람하는 정도였다. 그 무식한 용력을 보면서 경악하며 악마라 부른 건 덤(...) 사실 만일 직접 전장에서 만났다면 그건 군대가 궤멸되다 못해 완전히 끝장났다는 뜻이기 때문에 아무리 전쟁에서 궤멸당해도 군대를 보전했던 살라딘의 입장상 직접 만날 일이 없었다. 거기다 아미르들도 수십 명씩이고 아무렇지도 않게 학살해대는 리처드의 앞에 나타나는 건 나를 죽이라는 소리나 똑같은 소리기 때문에 나갈 리가 없다.] 사신이나 편지로 교류했다. 둘은 서로를 상대방 진영에서 가장 훌륭한 인물이라고 칭찬했다. 리처드가 돌아올 땐 예루살렘을 탈환하겠다고 하자 살라흐 앗 딘은 "기왕 뺏길 거면 당신 같은 훌륭한 사람에게 뺏기는 게 낫다."고 대답했다. 이때의 휴전 조건이 예루살렘 순례자를 박해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는데, 가톨릭 쪽에서도 십자군 전쟁의 명분을 살렸다고 할 수 있고, 이슬람 쪽에서는 살라흐 앗 딘의 치세 이후로 순례자를 박해한 적이 없으므로 문제 될 것이 없는, 그런 대로 원만하면서도 별 내용 없는 타협이었다고 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